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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말하는 패션

The Fashion Publications.

 

 

Text  Hong Sukwoo

Images Courtesy of Various Brands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클릭 한 번으로 새로운 컬렉션을 주문하고, 온갖 브랜드가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지금 패션계의 현주소다. 하지만 모바일 퍼스트 Mobile First 전략과는 반대로, 다양한 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여전히 책과 출판물에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디지털 소셜 미디어 시대인 지금, 여전히 촉감을 느낄 있는 종이 책’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그 매력을 호소하고 있을까?

© The Day of My Death by Gosha Rubchinskiy, 2016. Courtesy of IDEA Books.

© IDEA Books in Comme des Garçons Trading Museum Paris. Photographed by Hong Sukwoo.

    2017년도 봄/여름 파리 패션위크 Paris Fashion Week가 한창이던 지난 2016년 9월 하순, 파리 파오보그 세인트 호노레 Rue du Faubourg Saint Honoré 지역 꼼데가르송 COMME des GARÇONS 매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새로운 플레이 PLAY 라인 카디건과 티셔츠를 구매하는 사이, 내 관심은 오로지 매장 안뜰 맞은편 꼼데가르송 트레이딩 뮤지엄 Comme des Garçons Trading Museum에 있었다.

    도도한 직원들은 패션위크를 맞이하여 방문한 낯설거나 친숙한 몇몇 고객을 위해 이른 오후임에도 걸어 잠근 문을 손수 열었다. 꼼데가르송이 직접 고른, 그러나 꼼데가르송은 ‘아닌’ 옷과 장신구들이 특유의 원목 장식장 곳곳에 걸려 있었지만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신상품 코트나 한정판 스니커즈가 아니었다. 트레이딩 뮤지엄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패션과 문화, 디자인 서적을 판매하는 아이디어 북스 IDEA Books가 유통하는 한 권의 한정판 서적이었다.

    책장 선반에는 모스크바 출신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진가, 고샤 루브친스키 Gosha Rubchinskiy의 사진집 더 데이 오브 마이 데스 The Day Of My Death가 몇 권 남아 있었다. 온라인에는 이미 씨가 말라서 아마존닷컴 Amazon.com에서 2백 달러 남짓하게 거래되는 1,000부 한정의 사진집을 손에 쥐고, 계산대에 서서 기다리는 시간에 왠지 안달이 났다. 편애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사서 입는 1차원적인 성취감과는 별개로, 디자이너가 포착한 세계관을 ‘손에 쥐고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는 만족을 60유로짜리 사진집에 부여한 소비 행위였다.

    젊은 디자이너가 낸 한 권의 ‘컬트 cult’ 사진집 구매기를 퍽 장황하게 썼다. 하지만 요즘 패션계의 흐름을 바꾸는 디자이너들은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각자의 창조와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보는 것만으로 시선을 압도하며 사치의 극치를 느끼게 하는 패션 하우스들이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커피 테이블 북 coffee table book을 출간했지만, 요즘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출판물’에 공들이는 모습이란 이전 세대 고급 패션 브랜드의 움직임과는 조금 다른 경향을 띤다.

© Epiphany by Alessandro Michele & Ari Marcopoulos, 2016. Images Courtesy of Gucci.

© A Magazine Issue 16: A MAGAZINE CURATED BY ALESSANDRO MICHELE, 2016. Courtesy of A Magazine.

    스케이트보드와 청년 문화 youth culture를 기록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진가이자 영화감독, 아리 마르코플로스 Ari Marcopoulos는 지금 가장 뜨겁게 주목 받는 패션 하우스 중 하나인 구찌 Gucci알레산드로 미켈레 Alessandro Michele와 일주일을 보냈다. 그렇게 2016년도 프리폴 Pre-Fall 컬렉션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책 에피파니 Epiphany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the god of wine’, 디오니소스 Dionysus를 기념하는 주현절 主顯節에서 이름을 딴 탐미적인 출판물이다. 누구보다 날 것 그대로를 포착하는 데 능한 사진가와 유럽 고대 문화의 향수를 동시대 기성복에 주입하는 데 특출한 디자이너의 만남이었다.

    시대가 주목하는 패션 창작자들에게 항상 문을 열어두는 에이 매거진 A Magazine Curated By 역시 톰 브라운 Thom Browne에 이은 열여섯 번째 큐레이터로 역시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택했다. 같은 종이 출판물이라도 해당 시즌의 상업성을 충실하게 담은 룩북 lookbook과 달리, A 매거진은 ‘잡지’와 ‘단행본’의 중간에 있는 패션 출판물로서 매장에 걸린 옷과 액세서리가 나오기 전, 디자이너들이 어떤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하고, 영감을 얻는 ‘과정’에 집중한다. 값비싼 가죽 가방과 수백만 원짜리 기성복이 ‘결과물’이라면, 좀 더 긴 호흡으로 디자이너의 생각을 엿보는 단서가 ‘출판물’에 담겨 있는 셈이다.

    패션과 책이 만나는 경우의 수를 실제 공간에서 벌어진 전시에 접목한 예도 있다. 얼마 전 용산구 독서당로 디뮤지엄 D Museum에서 막을 내린 에르메스 Hermès의 전시 파리지앵의 산책 Wanderland은 무대 디자이너 위베르 르 갈 Hubert le Gall과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 Bruno Gaudichon이 협업하여 하나의 환상적인 ‘산책 wander’의 장을 만들어냈다. 훌륭한 전시와 더불어 동명의 아트북 역시, 전시의 미니어처 혹은 기념품처럼 관객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다는 후문이다.

© Summercamp by Pierre-Ange Carlotti & Vetements, 2016. Image Courtesy of IDEA Books.

© Isolated Heroes by Raf Simons & David Sims, 1999. Images Courtesy of Raf Simons.

    오랜 시간 아카이브를 쌓은 패션 하우스들이 명성을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출판물을 활용한 것처럼, 새로운 고객들에게 새로운 유산을 알리는 도구로 책을 펴내는 디자이너들 또한 존재한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 Demna Gvasalia는 동시대 패션의 규칙을 부숴버린 자신의 기성복 레이블, 베트멍 Vetements을 ‘거품’이 아닌 하나의 ‘문화’라고 말한다.

    베트멍 크루의 사진가 피에르 앙주 칼로티 Pierre-Ange Carlotti가 찍은 첫 번째 사진집 이후 만 1년이 지나지 않아 출간한 두 번째 책 섬머 캠프 Summercamp는 여름 성경 캠프를 연상케 하는 제목처럼 베트멍 집단 collective이 2017년도 봄/여름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엮은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다. 총 48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는 규격화한 전형적인 패션 카탈로그와는 전혀 다른 선구자들의 일상이 쥬시 꾸뛰르 Juicy Couture부터 챔피온 Champion에 이르는 화려한 협업과 함께 골고루 등장한다. 뎀나의 뮤즈인 모델 폴 헤멀린 Paul Hameline이 초점 잃은 렌즈 앞에서 술을 마시고,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 Lotta Volkova가 혁명처럼 비장하게 ‘베트멍’ 깃발을 파리 한가운데서 흔든다(비유가 아니다).

    ‘뎀나와 아이들’이 만드는 이 같은 출판물을 보며 그들이 존경해마지 않은 전세대 장인들, 라프 시몬스 Raf Simons와 메종 마르지엘라 Maison Margiela가 출간한 여러 독립 출판물이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 Past, Present and Future by Jonathan Anderson & Luis Venegas, 2016. Images Courtesy of Loewe.

© Loewe Publications on iBooks, 2016.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전설’들과 작업하며 신·구세대의 조화를 보여줄 수 있는 출판물이야말로 종이라는 아날로그 소재의 가장 훌륭한 표현 방식이 아닌가 싶다. 로에베 LOEW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 Jonathan Anderson은 학창 시절부터 동경한 거장들과 함께 자신의 레이블 제이더블유 앤더슨 J.W. Anderson, 그리고 로에베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아트 디렉터 듀오 엠/엠 파리 M/M Paris와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 Steven Meisel이 ‘거장’으로서 브랜드에 진중한 무게를 싣는다면, 동년배 스타일리스트 벤자민 브루노 Benjamin Bruno팬진137 Fanzine137의 발행인 루이스 베네가스 Luis Venegas는 그의 비전을 이해하는 뜻깊은 친우들이다. 로에베는 매 시즌 발행하는 룩북에 어느 패션 브랜드보다 힘을 쏟는 편인데, 그 이면에는 ‘출판물’ 특유의 매력을 이해하는 참여자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무게만 3kg에 달하는 전화번호부 크기의 출판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Past, Present and Future를 두고 조너선 앤더슨은 ‘브랜드의 시각적인 역사를 담아낸 책’으로 정의한다.

    로에베의 모든 것을 담은 이 책은 브랜드를 이해하는 유용한 참조 도구 useful reference tool이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미래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125유로에 달하는 이 한정판 브랜드 서적을 사기 버겁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모바일 시대를 누구보다 이해하는 이 영리한 디자이너는 누구나 아이폰으로 저장하고 볼 수 있는 ‘아이북스 iBooks’ 버전도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공간의 제약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무료다.

    이처럼 패션과 책의 만남이 매력적인 이유는, 특히 오랜 세월의 흐름을 한곳에 담아 정리하고 디자이너의 창조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데 책만큼 좋은 플랫폼이 없기 때문이다. 제목과 내용은 물론 배열과 주제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와 편집자, 사진가와 아트 디렉터가 모여 시간을 들인 온갖 피사체를 한 번에 정리해서 보여주는 데 말이다. 전자책이나 스마트폰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두꺼운 양장본 표지의 무게감 있고 우아한 자태, 그 책을 처음 뜯는 순간의 기쁨을 차가운 유리 액정이 결코 모방할 수 없듯이 말이다.

    This article was originally published by Harper’s BAZAAR Korea,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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