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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글 8

The Night Article

    더 네이비 매거진 The NAVY Magazine은 온라인 잡지를 표방하지만, 사람이 만듭니다. 기사로 하는 이야기들과 다른, 밤과 새벽의 생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글들은 대체로 다음날 아침에 보면 지워버리고 싶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밤 Night” 메뉴는 비정기적으로, 매일 밤 자정부터 다음날 해가 뜨기 전까지 나타납니다. 낮과는 조금 다른 밤의 생각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Sun, February 18, 2018

    설날에는 할머니 댁에 갔다. 좀 더 자주 찾아봬야 하는데, 마음만 항상 맴돌았다. 할머니를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애정이다. 손주에게 아무런 사심 없이, 본인 걱정이나 하시지, 하는 본심을 감춘 내 일부 퉁명스러움과 달리 할머니의 마음은 완성되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스스로 나이 드는 것보다 등골이 서늘할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건강 문제가 생길 때였다. 할머니는 날이 갈수록 앙상하다. 예전 병원에 오래 입원해계셨을 때, 그 너무나 얇은 발목과 손목을 보고 마음이 쓰려 우울해졌던 기억이 났다. 이미 몇 년이 지났다. 혈색은 좀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서서 걷지를 못하시니 더 작아지는 발이 유독 차가웠다. 양발을 주무르고, 힘이 없는 할머니를 대신하여 굳어진 뽀얀 발가락 사이 로션을 발라드린다. 할머니, ‘분’이 아니라 로션으로 보습을 해야 돼요. 이거 그냥 놔두면 무좀이나 욕창 될 수도 있다니까. 보통보다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여러 번 말을 한다.

    TV에서는 재미도 없는 영화가 나오고, 오래된 과거를 줄줄이 나열하실 때 그 안에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삶이, 할아버지의 삶과 할머니 자신의 삶이 있었다. 일본의 전문학교에 보내려는 할머니의 아버지께 울면서 싫다고 하셨다면서. 그때 어렸다는 말을 주름이 인생처럼 남은 할머니의 작은 치아 빠진 입술로 조곤조곤 말씀하신다. 나는 아이폰의 녹음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자주’ 오면 되지, 하고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음성, 사진, 감정 같은 것을 적어도 몇 시간 머물 때만큼은 앞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겠노라 다짐한 날이었다. 미국에도 고추장이 있느냐고, 어린 나는 이미 수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누님, 즉 고모할머니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단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코흘리개 시절에.

    카메라 얘기가 왜 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제 그만 찍어라, 하실 정도로 할머니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댄 탓이었으리라. 요 뒤에 오래된 나무 장롱이 있다. 할머니는 무얼 버리는 성격이 아니시기 때문에 – 그러나 우리 집보다 훨씬 간결하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 내 초등학생 시절, 미국에 몇 년 머무셨을 때 사 온 그 필름 자동카메라가 장롱 안에 있다고 하셨다. 차곡차곡 정리한 상자는 그 위에 또 다른 보자기와 비닐봉지로 쌓여 있다. 꺼내며 줄줄이 나온 몇 개의 낡은 가죽 가방들이 나도 아는 과거 일부를 떠오르게 하였다. 할머니는 카메라가 담긴 상자 아래 본인의 수의가 있다고 하셨다. 순간 마음이 철렁하며, 다가올 수밖에 없을 미래를 잠시 회피하였다. 할머니, 그런 말씀 마시고, 지금 건강부터 챙기세요, 진짜.

    할아버지는 6·25 한국 전쟁 때 전사하셨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같이 보낸 신혼은 3년 남짓이었다. 할아버지가 전사하신 해에 아버지가 태어났다. 엄마와 내가 ‘그만 제사 지내자’고 불평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훌훌 부드럽게 웃어넘기는 – 그런 면이 나와는 정반대이다 – 아버지는 사실 본인의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는 기분으로 들었다. 본인의 장례 절차를 슬쩍 흘리시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나는 여전히 너무 어린 손주였다.

    차례를 지내고 먹은 갈비찜을 내내 소화하지 못한 저녁, 고장 난 전자레인지를 볼 줄 아느냐고 물으셨다. 주에 몇 번 간호 도우미 분이 오시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집은 깨끗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낀 먼지 때가 보여 집안 곳곳을 닦았다(청소가 성격에 맞는다). 전자레인지를 동네 전파사 아저씨에게 맡기면 고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새 걸로 주문하였다. 나조차 쓰지 않는 복잡한 기능들 대신, 흰색에 타이머 두 개만 있어서 ‘해동’과 ‘가열’과 ‘타이머’ 조절만 하는 걸 샀다. 집에 갔을 때, 엄마와 다시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 기분이 뿌듯하였다.

    카메라를 꺼내고는 다시 짐을 주섬주섬 정리하여 장롱문을 닫다가, 누가 봐도 단아하게 건 할머니의 갈색 바지와 고전적인 무늬가 들어간 비단 스카프와 페이턴트 검정 가죽의 금속 버클 장식 벨트를 보았다. 스카프가 조금 삐뚤어져 있다면서, 바르게 걸어달라고 하셨다. 순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속으로 울컥하였다. 곱게 꺼내서 네모나게 접어 다시 걸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왠지 남겨야 할 것 같았다. 종일 손주와 ‘논다고’ 좋아하신 할머니에게 이제 쓰지 않는 아이폰 6S나 오래된 아이패드를 가져다드리겠다고 하였다. 할머니, 이거 있으면 화상통화가 돼요. 그럼 얼굴 보고 통화할 수 있어. 외국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써요. 쉬워. 그리고 공짜예요. 자신을 위해 소비하는 데 1%도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는 연신 누르던 셔터의 카메라를 보며 ‘이거 돈 나가는 거 아니니’ 하실 정도였다. 마음먹은 만큼의 실천은 아니어도, 좀 더 자주 뵙자고 생각하였다.

    집에는 걸어왔다. 걸으며 든 생각과 여운과 다시 할머니 생각이 뒤섞인 설날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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