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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붙여넣기 시대

The Copy and Paste Era in Contemporary Fashion.

 

Text  Hong Sukwoo

Images  Balenciaga, Nike, Helmut Land, One and J. Gallery

 

    하루에도 트럭 몇 대 분량쯤 새로운 것이 쏟아진다. 협업 collaboration, 창조 creation, 스타일 style의 진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본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문화 contemporary cultue와 패션 contemporary fashion이란 어느 순간 쉬운 모방과 적당한 타협의 결과물로 가득 찼다.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

    얼마 전 한 패션 화보 fashion editorial를 진행했다. 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스타일리스트로 참여한 촬영이란 흔치 않다. 친애하는 브랜드의 2018년도 봄/여름 컬렉션을 미리 영접하는 데 의의를 두고, 컬렉션 사진부터 과거 브랜드가 영감을 준 출판물의 흔적을 더듬었다. 다른 나라에서 도착한 커다란 상자 두 개에는 완벽하게 정돈한 컬렉션 샘플 옷과 신발이 담겼다. 친절하게도 수개월 전 파리 무대에서 선보인 차림새 그대로, 열 벌 남짓한 옷과 사진 프린트가 개별 포장되어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 옷 그대로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고, 구겨진 곳 없나 어시스턴트와 확인하여 모델에게 입힌 후, 사진가와 상의한 대로 다양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으로 반나절 남짓한 작업을 마무리했다. 참여한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찜찜했다. 이미 ‘알고’ 참여했지만, 사실 이 촬영에선 어떠한 스타일링 요소도 들어가지 않았다. 옷의 앞뒤를 뒤집고, 재킷 단추를 채우거나 풀며, 신발을 벗기거나 다시 신는 게 스타일링의 새로운 정의가 아니라면 말이다.

    전 세계 온갖 매체 관계자와 바이어가 참석하는 패션위크 fashion week 무대에 한 번 오른 후 검증을 받은 브랜드의 ‘스타일링 styling’을 그대로 사용하는 화보가 요즘 패션 잡지에 점점 늘어난다. 그때는 스타일링까지 손길이 닿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오히려 사진 자체에 집중할 수 있군, 하며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잡지와 온라인 매체에 범람하면서 조금 씁쓸한 상황을 여럿 보았다. 매체들은 저마다 성격과 지향점이 있는데, 표지에 나온 옷들이란 컬렉션에서 수개월 전 본 그대로 복제하였다.

    글도, 철학도, 무엇 하나 비슷한 점을 찾기 어려운 잡지들이 모두 동일한 스타일링의 결과물을 모델만 바꿔 가며 선보인다. 패션 브랜드들이 시즌의 출발로 삼은 3월과 9월호라면 더 심해진다. 뎀나 바살리아 Demna Gvasalia가 이룩한 발렌시아가 Balenciaga의 성취는 대단히 높지만, 변형한 플라이트 재킷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티셔츠 아래 후드 파카를 겹쳐 입은 소년들은 자세만 달리하여 모든 남성지에 들어찬다. 바뀐 것은 화보를 찍은 사진가들, 그리고 피부색과 인종이 다른 모델 정도일까.

© (Top) Them magazine Balenciaga Special issue, Fall 2017.

© (Left, Right) Balenciaga Autumn/Winter 2017 campaigns. Images courtesy of Them magazine, Balenciaga.

    소위 ‘패션은 산업’이라고 한다. 상업성을 배제하고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몰두하는 일이라면 이 시스템 안의 문제들을 무시하고 지나쳐도 된다. 패션 브랜드들은 그들을 지휘하는 디자이너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창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고객(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라는 의무감으로 독자적 ‘스타일(링)’을 건드리지 말 것을 공손히 요구한다. 한편으로 이해는 간다. 고심을 거듭하여 디자이너가 선보인 룩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룩 그대로 입은 유명인사들은 가끔 걸어 다니는 마네킹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람들이 별로 지적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패션에서 ‘스타일’이란 무대 위 창작 그대로 거리에 나오지 않았을 때, 항상 빛을 발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해석으로 디자이너 옷과 장신구를 걸쳤기에, 여전히 새로운 것들이 존재할까 싶은 시대에도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광고를 넘어 시대의 이미지로 남은 패션 사진의 역사는 이를 방증한다. 요지 야마모토 Yohji Yamamoto와 닉 나이트 Nick Knight의 1980년대 연작 캠페인, 에디 슬리먼이 포착한 도시 젊은이들의 흑백 사진,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들의 불안감을 건드린 라프 시몬스 Raf Simons 초기 컬렉션 이미지들은 일종의 현대적 고전 classic으로 남았다. 미니멀리즘을 2010년식으로 실천한 피비 파일로 Phoebe Philo의 첫 번째 셀린 Céline 컬렉션을 도전적으로 포착한 유르겐 텔러 Juergen Teller의 사진에서 받은 충격은 점점 더 과거 이야기가 되어 간다.

© (Left) Nike Inc. c/o Virgil Abloh™ “Ten Icons Reconstruction”.

© (Right) Helmut Lang Seen by Shane Oliver, 2017. Images courtesy of Nike, Off-White™, Helmut Lang.

    2017년 가을, 헬무트 랑 Helmut Lang의 새 출발을 알린 셰인 올리버 Shayne Oliver는 뉴욕 런웨이 무대에서 호평받은 컬렉션을 만들었다. 다만, 패션계를 은퇴하고 예술가로 전업한 헬무트 랑 본인의 1990년대 컬렉션을 개정하여 말 그대로 ‘리에디션 re-edition’이란 이름으로 헌정하고,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 과거로부터 온 영향이 아닌 복제 reproduction의 시대가 되었나 절감한다.

    고급 기성복 high-end fashion과 스트리트웨어 streetwear 씬을 합쳐 올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두 가지 협업 – 슈프림 Supreme과 루이비통 남성복 Louis Vuitton menswear, 그리고 오프화이트 Off-White™가 재해석한 나이키 Nike의  상징적인 스니커즈 sneakers 열 족 – 역시, 도합 네 개의 브랜드가 이룩한 성취를 영리하게 섞어내고 조합한 변형이었다. 사람들의 지갑을 즉시 열게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엄청난 소셜 미디어 피드를 보라). 하지만 과도한 모방 copy과 참조 reference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란 고유한 ‘스타일 style’의 지지자들이 아닌 ‘트렌드 trend’의 복제품이 범람하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남았다.

© (Top) Liz Magor, Cupped, polymerized gypsum, cigarette, 2017.

© (Left) Nina Beier, Manual Therapy, robotic massage chair, precious and noble metals from electronic waste, dental industry and various currencies, 2016.

© (Right) Marco Bruzzone, Untitled(from the series Hot Neutral Ground), electric cable, alkyd paint, 2017. One and J. Gallery 원앤제이 갤러리, No Eyes Dry 감동의 도가니 exhibition, October 12 – November 11, 2017. Images courtesy of One and J. Gallery.

    그래서 패션은 여전히 예술 art을 바라본다. 아닌 척하거나 온갖 애정을 드러내며, 이미 굳건한 사회에 부드럽게 저항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영향받는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들른 관객 한 명 없는 갤러리에서 설명 없이는 이해하지 못할 설치 작업을 보았다. 안마 의자와 여성용 가발, 동전 더미와 담배꽁초 같은 것들이 흰 상자 공간에 있었다. 입구의 A4 용지가 그 사유를 설명했다. 작가의 의도대로 작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행위 자체가 주는 감흥은 지금 패션에 지친 것과는 전혀 다른 감흥이었다.

    저마다의 창조를 갉아먹는 온갖 ‘규칙’이 서서히 ‘원칙’처럼 자리 잡아 세상을 더 획일적으로 바꾸는 시대, ‘진짜 original’로 생각한 것들이란 주류들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한 발 떨어져 세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왔다. 흐름에 충실한 문화는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진짜로 인정한 것들이란 변기에 이름을 붙인 예술가의 행위 같은 시도는 아닌가 생각하며 그 비밀스러운 공간을 빠져나왔다.

    This article has been contributed to Harper’s Bazaar Korea December 2017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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