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lar Post

카테고리

밤의 글 13 — 여름의 얼굴

The Night Article

    더 네이비 매거진 The NAVY Magazine은 온라인 잡지를 표방하지만, 사람이 만듭니다. 기사로 하는 이야기들과 다른, 밤과 새벽의 생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글들은 대체로 다음날 아침에 보면 지워버리고 싶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밤 Night” 메뉴는 비정기적으로, 매일 밤 자정부터 다음날 해가 뜨기 전까지 나타납니다. 낮과는 조금 다른 밤의 생각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Fri, June 15, 2018

    컴퓨터 앞에 붙어 있는 요즘인데, 뭔가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체감상 좀 되었다. 노래를 하나 듣는데, 평소 그렇게 관심 있지 않던 사이먼 도미닉이 낸 새 음반이다. 과거 그가 발표한 랩 앨범은 전혀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음반은 저녁이 밤이 되는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한다. 남이 쓴 남 얘기를 볼 때는 종종 글 쓰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음악으로 그런 건 꽤 오랜만이다.

    새 렌즈를 샀다.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딱 2주 걸렸다. 작고, 꽤 단단하고, 날이 서리도록 선명하다. 중국 브랜드 제품이 집에 조금씩 늘어난다. 사실 옷이나 패션을 떠올리면 그리 놀랍지는 않다. 언젠가 오랜만에 프라다 매장에 가서 무언가 가방을 사고 싶어져서, 몇 개 주섬주섬 보았는데 가방 안쪽에 메이드 인 차이나 Made in China 하얀 생산지 표시 탭이 보였다. 일부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한다는 걸 이미 알았지만,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소공동 명품 백화점 1층에서 보니 어쩐지 기분이 식었다. 결국 가방은 사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만든 렌즈를 독일에서 만든 카메라에 달고 있다. 어느 정도 디자인을 (꽤) 베낀 제품이다. 가격은 10분의 1 차이가 나지만.

    전시를 보러 가야겠다, 충동적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내일은 교토에 있고 싶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훅 사라졌다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다가, 선풍기 바람에 버켄스탁 신은 발에 다 식은 종이팩 안에 든 음료에 여기저기 눈이 왔다 갔다. 바로 아래는 번화가 신사동을 여실히 대변하는지 여기까지 사람들 목소리가 웅성대는데, 오늘 오후 중요한 발표는 꽤 정신 번쩍 들게 좀 망했는데, 그 후 자연스러운 순서로 기분이 멍해졌고 느린 거북이걸음처럼 머리는 서서히 멈춘 상태로 있다. 뭔가 올리면 신경 쓰이니 멀어진, 습관처럼 확인하는 인스타그램에 사진만 두 장 올리고 새로 고침을 몇 번이고 당겼다.

    습도가 낮은 여름의 초입, 아직 밖에서 – 가령 종로3가 포장마차 같은 데서 – 술 마시기 꽤 좋다. 긴소매 셔츠가 끈적이지 않고, 바람도 제법 서늘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근황 겸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몰랐으나 요즘 꽤 감정적으로 메말랐구나, 문득 생각하였다. 혼자 있어도 딱히 외롭지 않다. 집에 있어도 할 건 어쩐지 많다. 시간은 잘 가고, 일은 적당히 하고, 몰리는 시기가 오기 전에 하나둘 쳐내려고 노력만큼은 한다. 메일도 몇 개인가 아직 답장하지 않은 것들이 있고. 주말에는 해야지, 하며.

    새로 생긴 가게와 노을이 멋진 매장과 사람들이 지금 딱, 열광해 마지않은 것들이 결국 무언가 더 사세요, 더,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질려버린다. 그러한 시스템이 있고, 어느 정도 속해 있으며, 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알겠으나 그런다. 지금 입은 티셔츠는 새로 나온 나이키 ACG 제품이고 에럴슨 휴가 디자인했다. 8월까지 옷을 사지 않는다는 다짐은 그라운드웨이브 Groundwave의 고운 셔츠 두 벌을 사며 이미 깨졌다. 한창 일을 하는 미혼 남성의 소비를 생각하였다.

    다른 친구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 술 마셨을 때, 올해는 10월까지만 일하고 싶다고 했다. 11월에는 두 주 정도 한국에 없고 싶다고. 남은 두 달에 무언가 하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목소리가 낮고 표정이 굳어서 종종 오해를 받는 친구는 멋지네, 툭 던졌다. 그날 내가 성실히 응한 상담을 바탕으로 다시금 연애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동갑내기다(남의 연애란 조언하기 이토록 쉽다). 다 재미없어진 지 꽤 되었고 밤에 잠도 잘 안 온다는 친구는 그렇게 용기를 내었다.

    걷는 게 좋은데, 하릴없이 걷고 싶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얼른 다시 차에 타거나 집에 가고 싶어질 때가 많은 요즘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표정이 종종 찡그려지거나 심각했다.

    아, 맛있는 커피를 발견한 것은 최근 가장 좋은 일이었다. 애용하는 유리잔에 투박한 얼음을 넣고, 에스프레소 원액이 투명한 물에 희석하여 서서히 번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여름의 얼굴이다.

    금요일이 간다.

Follow on Facebook & instagram.

Comments

2018-05-17
밤의 글 12 — 시선
2018-07-07
밤의 글 14 — 초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