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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양품 Nº2 — 아크로님 ACRONYM®

ACRONYM® by Errolson Hugh; The Urban Functionalism.

 

Text  Lee Kang il, Creative Director of ISOFLX

Edit  Hong Sukwoo

Photography  Lee Kang il, ACRONYM®

    더 네이비 매거진 The NAVY Magazine의 목요일 Thursday, 스타일 Style 챕터는 비정기적으로 외부 칼럼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그 첫 번째는 기능성 기성복 아이소플럭스 ISOFLX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강일 Lee Kang il의 유인양품 有印입니다. 사람이 만드는 패션, 즉 사려 깊고 진중하게 만드는 ‘디자이너 브랜드 designer brand‘를 다루는 연재 칼럼입니다.

0. 서문 Acknowledgement

 

    길을 잃었다.

    가려던 곳은 학교인 샤링 크로스 로드Charing Cross Road. 보통은 지하철로만 다니던 길이었지만 중간 목적지에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걸어가 볼까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은 2008년, 지도 없이 런던 London 시내를 걷는 일은, 유학 온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되는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뉴 본드 스트리트 New Bond Street의 럭셔리 브랜드 매장들이 즐비한 거리에 이르렀다. 급한 일은 없으니 도버 스트리트 마켓 Dover Street Market; COMME dess GARÇONS이 런던 도버 스트리트에서 시작한 편집매장. – 필자 주이라도 가볼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두었다. 왠지 조금 시시해졌다.

    한때는 ‘입을 수 없는 옷’만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백화점이나 번화가 매장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미의 관점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진리의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옷의 흔한 개별 요소들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조합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준야 와타나베 Junya Watanabe랄지, 상식적으로 추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적 요소들을 당당히 미의 범주로 제시하는 알렉산더 맥퀸 Alexander Mcqueen이나 언더커버 Undercover®, 혹은 아예 일반적 옷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파격을 제시하는 마르탱 마르지엘라 Martin Margiela후세인 살라얀 Hussein Chalayan 등, 나에게 있어 패션은 입고 싶은 옷을 쇼핑하는 즐거움이 아닌, 일종의 개념 미술을 감상할 때와 같은 지적 쾌감을 얻는 예술 장르였다.

    한 달 내내 도쿄를 여행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독특한 편집매장만을 훑고 다닐 정도로 채워지지 않았던 지독한 갈증과 허기는, 결국 잘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고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끔 만들었다.

© Junya Watanabe Autumn/Winter 2006 collection, Undercover® Autumn/Winter 2004 collection.

    그렇게 입학한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대학 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 Design은 그때의 나와 똑 닮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고, 그때의 내가 갈구했던 바로 그 가르침을 주는 곳이었다. 정해진 규칙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는 수업이 아닌 프로젝트로 과제를 해결하는 자유로운 수업. 티셔츠, 셔츠, 혹은 흰색 옷감 white fabrics 같은 제한된 틀만을 둘 뿐 그 안에서 무엇이든 상상하게끔 하는 커리큘럼. 항상 관점을 새롭게 하기를, 발상을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는 교수님들.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전과한 터라 그곳에 모인 다른 동기들의 재능과 실력을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누구보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랬던 것이 불과 1년 전. 금세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기엔 조금 성질이 달랐다. 여전히 디자인하는 일은 즐거웠고, 순도 높은 완성도의 디자이너 브랜드를 발견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다만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한 조각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Design sketched by Dyson.

    그런 회의감은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된 ‘제품 디자인 product design’ 학과 수업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같은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묶여 있기만 할 뿐 그들의 발상은 근본적으로 패션과 달랐다. 패션 디자인 fashion design은 ‘분위기 mood’를 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제는 뭐든 상관없지만 대체로 특정 시대의 스타일, 이국적인 문화, 혹은 패션 아이콘 등에서 출발한다.

    특정 주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미지들, 구체적인 아이템, 그와 관련된 소재, 부자재, 자유롭게 떠오르는 발상을 담은 스케치들을 한데 엮어 ‘무드 보드’를 만들면 그것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외형’적 형태를 신선한 방향으로 창조하는 데에 효과적인 작업 방식이다. 그러나 제품 디자인의 시작점은 아예 차원 자체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이 디자인할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 의자에 앉게 될 사람은 이런 편안함, 이런 감정, 혹은 이런 기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 ‘경험’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윤리적인지, 혹은 상업적인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물론 최종 디자인으로 넘어갈수록 패션 디자인과 비슷한 ‘무드 보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방향성은 잃지 않았다.

    입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날의 수업 이후 이와 같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열광했던 것, 배워왔던 것. 그 과정에 그것을 입는 사람이 어떤 ‘경험 experience’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원해 자발적으로 들어온 세계는 맞다. 세인트 마틴은 기본적으로 예술 학교. 패션을 사람이 입는 ‘라이프웨어 lifewear’가 아닌 일종의 조형 미술 분파로 이해하는 곳. 그리고 하이패션 high fashion이란 패션을 개념 예술로 이해하는 장르(쇼에 등장하는 모델이 최대한 비현실적인 비율 proportion을 지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게 불만이라면 일본 쪽 기술 대학으로 갔으면 될 일이다. 사람이 입었을 때 편안한 1인치의 패턴 차이를 찾아내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을 거다.

    아니. 오직 전통만을 습득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새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 쏟는 에너지의 반의반만이라도 착용자의 ‘경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대 가장 혁신적이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이 모여있다는 도버 스트리트 마켓이나 브라운즈 Browns 같은 편집매장을 돌아다녀도 그와 같은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중저가 브랜드의 매장에선 ‘혁신’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없는, 과거의 답습만이 즐비했다. 어디서도 내가 원하는 그 방향으로 새로운 길에 대해 고민하는 옷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소재, 퍼포먼스, 수납 등 옷과 가방 등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기능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학교 수업에 발표하는 결과물들도 이런 연구 성과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스톤 아일랜드 Stone Island의 디자이너로 일하는 영국인 동기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전까지는 딱히 교류가 없었지만, 얼마 전 진행된 수업에서 사첼 school Satchel 형태의 가방을 통째로 옷에 달아버린 코트 디자인을 발표한 이후 부쩍 내게 관심이 커진 듯했다.

    “아크로님 ACRONYM®이란 브랜드 알아?”

    그는 자신이 연구한 내용이라며 아크로님 ACRONYM®이란 생소한 브랜드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첫인상은 약간 독특한 모델을 쓰는 ‘다크 웨어 darkwear’ 브랜드였다. 당시 한창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릭 오웬스 Rick Owens의 영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점이었고, 아크로님 역시 ‘올 블랙 all black’으로 무장한 옷들이었기에 수많은 그저 그런 아류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비웃으며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 ACRONYM®, Acronymjutsu J1A GT V25 A.

    조악한 화질의 홈 카메라로 찍은 영상 속에 한 동양계 모델이 메신저 백을 메고 등장한다. 가방을 휙 돌려 앞으로 당긴 후 무심히 차곡차곡 접힌 재킷을 꺼내 펼쳐 들더니 가방은 벗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 지퍼를 여닫길 몇 번 하더니 가방은 어느새 옷 뒤로 숨겨져 있었고 팔을 휙 내저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한다. 이어폰을 꺼내서 옷깃 collar 쪽에 붙이더니 역시 가방은 벗지도 않고 재킷을 벗어내고는 가방 메듯 몸을 가로질러 내둘렀다.

    브랜드의 홍보 영상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한, 이 옷과 가방에는 이런 기능이 있다는 설명만 단순한 몸짓으로 집어넣은 투박한 영상으로 나는 확신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지점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적어도 세상에 한 명은 있다는 것을.

1. 아크로님의 탄생 Birth of ACRONYM®

 

    디자이너 에롤슨 휴 Errolson Hugh가 독일 뮌헨 Munich, Germany에 설립한 아크로님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디자인을 생산하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공동 창립자이자 아내인 미하엘라 사첸바커 Michaela Sachenbacher와 함께 독일의 수많은 스키·보드복 메이커 외주 디자인을 담당하는 일부터 시작한 에롤슨 휴는 디자인 과정에서 문득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테크니컬 스포츠웨어에 사용하는 수많은 기능을 왜 일상생활을 위한 옷에는 쓰지 않는 거지?”

    당시가 1990년대 말이었으니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 반응은 냉담했다.

    “아주 어려운 작업인 데다 가격도 엄청 비쌀 게 뻔한데 누가 사겠어?”

    어떤 투자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자비를 들여 독자적인 디자인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자본금이 적은 만큼 풀 컬렉션과 같은 큰 규모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그는 하나의 ‘완벽한 재킷’을 만드는 걸 목표로 작업을 시작한다.

© 앤드 완더 And Wander.

    우선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첨단 기술 high-tech을 보유한 ‘일상복 daily wear’을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이미 첨단 기술로 무장한 등산복이나 스키복 등을 일상생활에 입으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일본에는 앤드 완더 And Wander스노우피크 Snow Peak처럼 일상적으로 입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간결하게 정제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아웃도어 브랜드가 많다. 또한, 원래 목적인 등산이나 캠핑 등을 즐기는 데 기능적으로 무리가 없다. 물론 에롤슨 휴가 처음 아크로님을 기획했던 시점이 90년대 말임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발상이 지금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가 지금 이 시대에 처음 아크로님을 기획한다고 해도 그는 기존 ‘하이테크 스포츠웨어 high-tech sportswear’를 개조 conversion하는 수준의 디자인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에서 이러한 특수복들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완벽한 기능을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도시의 일상’을 위한 기능이란 무엇일까.

© 에롤슨 휴 Errolson Hugh가 새롭게 선보인 나이키 ACG 컬렉션 Nike ACG·All Conditions Gear.

    우선 방수, 방풍, 보온, 속건 등 외부 기후 환경으로부터 착용자의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보다는 필요한 방수나 보온의 기능적 레벨이 낮을 수 있고, 마라톤 선수들보다는 필요한 속건 원단이 물에 젖었을 때 빠르게 마르는 기능의 기능적 레벨이 낮을 수는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 역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덥다. 특히 에롤슨 휴가 사는 독일 뮌헨과 같이 날씨가 궃은 도시는 예고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우산보다는 완벽하게 방수가 되는 재킷이 절실했을 것이다.

    ‘활동성 activity’도 빼놓을 수 없다. 스포츠를 즐길 때처럼 격렬한 움직임이 필요하진 않지만 옷이란 가벼울수록 피로하지 않고 움직이기 편할수록 만족도가 높은 법이다. 또한 에롤슨 휴는 가라데 유단자로서, 모든 가라데 동작을 수행할 수 있는 옷을 목표로 디자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된 두 가지 기능은 등반 climbing이나 스키 등 아웃도어 스포츠웨어가 가장 오랫동안 연구해왔던 분야이며, 원단, 부자재, 디테일 등 모든 방면에서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도시형 아웃도어 urban outdoor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기는 이유도 ‘착용자 보호’와 ‘움직임’이라는 기능적 과제에 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해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필요한 기능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인 ‘수납’에 대해서 아웃도어 스포츠웨어는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 ACRONYM® J47A-GT Goretex Interops Jacket, ACRONYM®‘s details on the bottom.

    우리는 집에서 나갈 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다양한 소지품을 들고 다닌다. 스마트폰이나 지갑 등 자주 꺼내 써야 할 뿐 아니라 도난 위험이 높은 중요 소지품도 있고,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필요할 수 있는 화장품이나 책, 이어폰 등과 같은 소지품도 있으며, 노트북 컴퓨터처럼 무겁고 충격에도 민감한 고가의 소지품도 갖고 다닌다. 이러한 소지품들은 각 특성에 따라 보관하는 방식도 알맞은 형태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스마트폰, 지갑 등은 자주 그리고 빨리 꺼내 써야 하는 만큼 재킷이나 바지 주머니에 지니고 다녀야 편하고,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 PC 등은 외부 충격에서 기기 device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쿠션을 지닌 가방 등에 보관해야 좋다.

    이렇듯 소지품 특성에 따라 포켓의 모양, 적절한 위치 등이 있고, 가방 역시 내부 수납공간의 설계나 메는 방식 등에 있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테크니컬 아웃도어 스포츠웨어의 경우 옷에 있는 수납공간은 무게를 위해 되도록 삭제하며, 가방 역시 침낭이나 텐트 등 부피가 큰 형태를 담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 충격에 민감한 기기를 담아내기엔 적합하지 않다.

    이를 위해 에롤슨 휴가 연구한 분야는 밀리터리웨어 military wear, 즉 군복이다. 군인들은 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들을 소지해야 한다. 탄창이나 나이프, 권총과 같은 무기부터 비상 구급약과 지도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특성, 크기와 무게 등이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든 소지품은 필요한 시점에 아주 빠르게 꺼내 쓸 수 있어야만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속도 speed는 생명과 직결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군복의 수납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얼마나 안전하게 많은 양을 보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꺼낼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밀리터리 재킷과 바지에는 곳곳에 다양한 주머니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손으로 꺼내기 쉬운 위치에 놓여있다. 형태 역시, 부피가 큰 카고 주머니 cargo pocket 형태가 대부분이었던 빈티지 군복과는 달리 물건이 없을 때는 납작하다 수납할 때 부피가 커지는 입체적인 패턴을 활용한 형태로 진화했다. 가방들 역시 단순히 물건을 많이 넣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달리는 데 무리 없을 정도로 밀착하는지, 필요할 때 재빠르게 소지품을 꺼낼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따져서 디자인했다. 물론 전장 戰場에서 필요한 소지품과 일상생활에 쓰이는 소지품에는 차이가 있지만, 수납공간의 위치나 형태, 수납 동작 등에 관한 연구는 충분히 일상복을 디자인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참조 reference가 된다.

    아웃도어 스포츠 outdoor sports와 밀리터리. 이 두 가지 방대한 영역을 바탕으로 에롤슨 휴는 도시 생활 city life에 필요한 기능들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나름의 해답을 얻어낸다. 방수와 방풍, 투습 등의 기능에 있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고어텍스 GORE-TEX® 스포츠 쉘 원단에 기반을 두고, 방수가 가능한 YKK사의 아쿠아 가드 Aquaguard 지퍼 등을 사용해 군복에 기반을 둔 주머니 디자인을 접목한다는 큰 얼개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소재 및 형태 등을 합치는 과정에서 에롤슨 휴는 일반적인 패션 디자인 방법론을 전복 顚覆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바로 20세기 초 산업 디자인계를 휩쓸었던 기능주의 Functionalism 방법론을 접목한 것이다.

©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의 바실리 의자 Wassily Chair.

2. 기능주의 Functionalism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 Louis Henri Sullivan에 의해 유명해진 이 명제는 20세기 초반 기능주의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로 널리 회자해왔다. 인위적이고 장식적이던 전근대 디자인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 사조는 충실히 기능만을 따라가다 보면 형태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었다. 기능주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사진가 칼 블로스펠트 Karl Blossfeldt의 식물 사진들처럼, 자연은 그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기능에 충실할 뿐이지만 복잡하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형태가 뒤따라온다는 논거를 제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연물이 수억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지금의 형태가 됐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일정 기간 해낼 수 있는 영역이란 한계가 있고, 우선적인 가치를 기능성의 진화에 둔다면 나머지 영역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아이언맨 Iron Man 1편을 생각해보자.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한 토니 스타크 Tony Stark는 동굴 속에서 탈출을 위한 기계 갑옷을 만들고자 한다. 동굴에서 구할 수 있는 한정적인 재료만 사용 가능한 데다 만들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외형은 제쳐두고 일단 기능적인 부분만 완성하게 된다. 따라서 그 외형은 후에 완성한 아이언맨 마크 2 Iron Man Armor MK II 수트와 비교하자면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 Braun SK 2 Radio designed by Dieter Rams, 1960.

    이와 같은 이유로 초기 기능주의 디자인은 어딘지 건조하면서 생경해 보이는 디자인이 많다. 기능적 발전과 혁신에 중점을 두었을 뿐 그것을 완성하는 소재나 색상 등은 별다른 콘셉트 없이 가장 저렴한(기능적인 완성도를 놓치지 않는 선에서) 혹은 구하기 쉬운 것들로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디자인 아카이브 archive를 배격하고 조금이라도 더 기능적인 방향으로 형태를 맞춰 나갔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굉장히 기괴한 모습도 많았다. 초기 기능주의가 후대 디자이너들에게 비판받은 이유도 이러한 ‘형태 form’ 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으며, 이후 디터 람스 Dieter Rams 등의 디자이너들에 의해 최소주의 minimalism·미니멀리즘와 결합하면서 비로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에롤슨 휴는 거칠고 엉성했던 초기 기능주의에 주목한다. 건축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르코르뷔지에 Le Corbusier를 비롯한 20세기 초 기능주의 건축가들의 이론서를 탐독해왔던 그는, 형태에 대한 일체의 콘셉트 없이 기능적인 요소들만을 완벽하게 완성하는 그들의 방향성에 공감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얻은 생경한 외형들 역시 단순하고 간결한 simple 옷이 지배하는 패션계에서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줄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컸다. 고어텍스와 같이 고가 원단을 주로 판매하는 업체는 대부분 일정 수량 이상을 주문해야만 발주할 수 있다. 그러나 검정 black color처럼 대부분 업체가 자주 주문하는 흔한 색의 경우 재고를 남겨두기 마련이고, 규모가 작은 업체인 아크로님은 이런 재고 물량을 소량 발주해 디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즉, 형태에 대한 콘셉트를 정하고 특정한 느낌과 색상을 지정하는 동시에 기능까지 완벽한 재료를 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아예 형태에 대한 콘셉트는 철저히 무시하고 기능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 ACRONYM® J1A-GT Jacket.

    이런 과정으로 처음 디자인한 결과물이 ‘J1A’ 재킷이다. 스웨덴 모터사이클 부대의 유니폼 재킷에 기반을 두고 디자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능적인 필요로 형태를 과감히 삭제하고 변형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고기능성 고어텍스 스포츠 쉘 원단, 움직임을 고려한 입체 패턴, 군복에서 영향받은 합리적인 주머니 형태와 위치 등 아웃도어와 밀리터리에서 도출한 연구 성과들을 짜임새 있게 구성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따로 있다. 등산이나 전투와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오로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능적 편의를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포함했다는 점이다.

    도시에서는 날씨 변화에 따라 혹은 장소를 이동함에 따라 재킷을 벗거나 입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비 오는 쌀쌀한 거리를 걸을 때는 방수 재킷을 입어야 하지만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 실내가 더워지므로 벗고 싶어지는 것과 같이 이치다. 그러나 끈 strap이 몸을 가로지르는 크로스백 cross bag을 맸을 때는 재킷을 입고 벗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J1A’ 재킷은 뒷부분을 자르듯 분리하는 긴 지퍼가 존재한다. 이 지퍼를 위로 올리면 옷이 반쯤 잘리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잘린 앞부분이 크로스백 안쪽을 통과하면 가방을 벗지 않고도 재킷을 입을 수 있다(위 사진 참조). 물론 재킷을 벗을 때도 가방을 벗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재킷 안쪽에 있는 끈을 이용해 크로스백처럼 재킷을 몸에 걸칠 수 있어, 비에 젖은 재킷을 손에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했다.

    또한, 휴대폰은 벨이 울리는 순간 재빠르게 꺼내야 하는 소지품이지만 보통은 재킷 주머니나 가방에 보관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꺼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에롤슨 휴는 이런 불편을 해결하고자 손목 쪽에 지퍼 주머니를 만들고 팔을 힘차게 휘두르면 무게로 인해 휴대폰이 손안으로 쏙 들어오도록 설계한 ‘그래비티 포켓 gravity pocket’을 개발한다. 아울러 이어폰을 잠시 붙일 수 있는 자석 패널을 옷깃 후드 옆면에 부착하는 등 도시 생활자를 위한 세심한 디테일을 추가했다.

    이렇듯 어떤 옷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심한 아이디어까지 결합한 ‘J1A’ 재킷은 도시 생활자를 위해 완벽한 기능을 제공하는 결과물로 탄생했다. 에롤슨 휴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과감한 디자인 실험에 돌입한다. 수납과 여밈 형태 등 다양한 기능적 디테일을 개발하고, 실루엣 역시 블루종 blouson, 파카 parka, 코트 coat, 테일러드 재킷 tailored jacket 등 현존하는 모든 옷의 분야로 확장한다. 그 후 이런 요소들을 경우의 수 조합하듯 무한대로 자유롭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해냈다. 큰 규모의 브랜드라면 상업성 때문에 망설였을 과감하고 생경한 형태까지 모두 수용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 과거의 어떤 옷과도 연결점을 찾아내기 어려운 맥락 없는 옷들이 매년 등장했다. 내가 소유한 ‘J53TS-GT’ 역시 이런 디자인 실험의 결과로써 등장한 2016년 작품이다.

3. J53TS-GT

 

    전체적인 외관은 탈부착이 가능한 후드를 제외한다면 전형적인 매킨토시 Mackintosh 코트 실루엣을 차용한 싱글 칼라 single collar 코트 형식이다. 그러나 전면부 금속 지퍼부터 사선으로 5각형 형태를 띠는 손 주머니 hand pocket와 그 위에 위치한 기묘한 테이프까지 오밀조밀 구성하여, 어떤 기능들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검은색 테이프는 현재 밀리터리 기어에서 사용하는 몰리 시스템 Molle System을 아크로님 취향으로 깔끔하게 변형한 ‘테크 시스템 그리드 ACRONYM® TEC SYS GRID’ 이다. 몰리란 ‘Modular Lightweight Load-carrying Equipment’의 약자로 파우치와 같은 외부 부착형 장비를 가방이나 옷 등에 부착하는 방식을 통일된 규격으로 시스템화한 것을 말한다. 보통 25mm 웨빙 테이프를 35mm 간격으로 봉제해 부착한다. 이 시스템을 갖춘 파우치 등의 장비는 몰리가 적용된 그 어떤 가방이나 옷 등에도 부착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수납공간을 효율적으로 바꿀 customizing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롤슨 휴는 이 통일된 규격은 그대로 둔 채, 조악해 보일 수 있는 스티치 형식 대신 열접착 방식으로 만든 자신만의 새로운 몰리 시스템을 개발했다. 아크로님에서 나오는 모듈식 modular 파우치도 있지만, 몰리 시스템을 적용한 파우치라면 그 어떤 것도 부착할 수 있기 때문에 아크로님을 착용한 사람들의 거리 패션 사진 street fashion photography들을 보면 다양한 용도로 응용한 것을 볼 수 있다.

© ACRONYM® J53TS-GT Coat. Photographed by Lee Kang il.

    손목은 벨크로 velcro 여밈으로 바람을 막도록 처리했다. 아웃도어 재킷에서 흔히 쓰이는 방식이지만 벨크로가 사선으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보통은 끈에 맞춰 수평으로 붙어 있다). 이는 손목 부분을 접고 여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끈이 사선 윗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수많은 현장 경험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섬세함이다.

    뒤쪽에도 역시 테크 시스템 그리드가 수평으로 부착되어 있다. 아래쪽 사선으로 뻗은 기다란 지퍼는 J1A 재킷부터 이어져 내려온 디테일로 크로스백을 벗지 않고 재킷을 입고 벗을 수 있게 도와주는 용도로 사용한다. 무광 방수 지퍼는 물이 지퍼 사이로 새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등산복이나 스키복 등 아웃도어 재킷 분야의 전문가인 에롤슨 휴이지만, 본작에서 특별히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한 입체 패턴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분할 면이 많아 왠지 복잡해 보이지만 일반 패턴을 수평으로 잘라놓은 수준인데, 등 부분의 팔 이음새 역시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만 재킷을 입은 상태에서 뒤쪽을 봤을 때 몸과 팔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 보여 깔끔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정도 효과를 얻는 것치곤 잃은 것이 꽤 크다. 몸통과 팔 패턴 전체가 이어지는 큰 조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재단 후 원단 손실량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철저한 소량 생산 브랜드만이 가능한 스웩 swag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소매산 sleeves을 거의 주지 않은 둥근 어깨와 약간 휘어져 있는 팔 패턴 등 스포츠 패턴 요소가 군데군데 보이긴 하지만 다른 아크로님 작품에 비교해서는 얌전한 편이다. 아무래도 코트라는 형식이 주는 격식 formality 때문에 최대한 절제한 것으로 보인다.

    원단은 고어텍스 프로 GORE-TEX® Pro이다. 대부분 ‘고어텍스’를 등산복에 흔히 쓰는 폴리에스터 느낌의 특정 원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고어텍스’는 겉면 원단 밑에 부착하는 방수·투습 기능을 가진 멤브레인 membrane·박막 필름 부착 기술에 특화한 브랜드 이름이다. 즉 멤브레인 필름을 부착해 방수와 투습 기능을 지니게 된다면 겉면은 면이나 울 등으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히말라야와 같은 극한의 고지대를 등반하기 위한 재킷들은 모두 겉감으로 폴리에스터를 쓰는데, 물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발수 코팅 기능에 더 용이하며, 설령 물이 겉감으로 침투해도 금방 마르기 때문이다. 고어텍스 프로는 최고 등급의 클라이밍 재킷에만 쓰이는 최고 스펙의 원단이다. 기능성 원단의 4대 요건 – 방수, 투습, 발수, 속건 – 의 모든 요소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원단이기 때문에 겉감으로 폴리에스터가 쓰였다(개인적인 견해로, 도시에서 입는 옷을 지향하는 아크로님이 왜 고어텍스 프로까지 써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고 스펙을 향한 로망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쪽에 보이는 회색 원단은 멤브레인 필름을 보호하고 살갗에 닿는 감촉을 좋게 하도록 부착한 안감이다(겉감과 멤브레인 필름, 안감을 고열·고압력으로 접착했다고 해서 3 레이어 3-Layer 원단으로 부른다). 절개선마다 테이핑 처리한 것을 ‘심 실링 seam sealing’이라고 하는데, 봉제선 사이로 물이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극단의 기능성 디테일이다. 디자인이 얌전하기로 유명한 나나미카 Nanamica비즈빔 Visvim도 이 심실링 테이프만큼은 배색이나 로고 등을 눈에 띄게 인쇄해 포인트를 주기도 하는데, 기능과 무관한 장식을 철저히 배격하는 아크로님답게 안감과 같은 색으로 무덤덤하게 처리했다.

    고리에 걸려 있는 끈은 재킷을 벗어 가로질러 몸에 매도록 도와주는 용도로 사용하며, 길이를 조절 장치 adjusters로 몸에 꼭 맞는 길이로 맞출 수 있다. 게다가 탄력 있는 밴드로 제작하여 흔들림 없이 꼭 맞게 맬 수 있다. 모든 디테일이 단지 겉에 드러난 자태가 아닌 실제 쓰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였음을 알 수 있는 세심한 부분이다.

    옷깃에는 아크로님 로고를 새긴 패널과 자석을 두 개 포함한 패널을 벨크로 탈부착 형식의 패치를 제공한다. 자석 패널은 이어폰을 붙여 놓을 수 있어 잠시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편리하다. 옷깃 쪽에는 5호 비슬론 지퍼가 마감하지 않은 상태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퍼는 옷깃을 세운 뒤 여미는 용도로 쓴다. 보통의 맥 코트 Mac coat는 이 역할을 원단으로 만든 날개 flap와 단추로 대신하지만, 본작에서는 지퍼를 채워 올리는 것만으로 옷깃을 세워 목 쪽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지퍼를 끝까지 마감하지 않고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매달리는 형태로 두었다는 사실이다. 방법을 만들어보자면 깔끔하게 마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지퍼를 결합하는 행동이 조금 어려워지는데, 이런 점 때문에 차라리 마감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상의 기능성을 위해서라면 기존 형식을 구태여 따르지 않는 아크로님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손 주머니는 두 개의 수납공간을 겹친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한쪽은 지퍼로 개폐하는 방식으로 소지품을 수납하기 적당하며, 뒤쪽 공간은 기타 여밈 장치가 없기 때문에 손을 편하게 넣기 좋다. 여기서도 지퍼가 살을 노출한 채로 봉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완성’의 미학은 메종 마르지엘라 Maison Margiela부터 꼼데가르송 등 수많은 디자이너가 제안한 형식이지만, 아크로님은 미학적인 실험이 아닌 기능적인 이유로 선택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다른 디자이너들과 차이가 있다.

© Acronym® Autumn/Winter 2017-2018 collection. Directed by Ken-Tonio Yamamoto and Errolson Hugh.

4. 현실 세계를 넘어서 Beyond the Real World

 

    J1A 재킷을 개발한 후 2002년 아크로님이란 이름으로 소규모 캡슐 컬렉션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2003년 파리의 유명 편집매장 꼴레트 Colette에서 판매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패션계에서 아웃사이더로 머물렀다. 2008년까지 파트너 미하엘라 사첸바커와 단둘이 모든 일을 처리했을 정도로 브랜드를 확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연이 넓어지지 않았을 뿐 아크로님의 디자인 세계는 더 깊고 단단해졌다. 그들은 주류 mainstream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한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생각해 자유롭게 그들이 하고 싶은 디자인과 프레젠테이션 형식을 실험한다. 최고급 원단과 부자재로 파격적인 디자인을 시도할 수 있었으며, 화려한 런웨이 컬렉션을 하는 대신 에롤슨 휴 자신이 직접 모델로 등장하는 담백한 룩북 lookbook과 영상 film으로 브랜드를 홍보했다.

    일반적인 수준의 홍보나 판매를 거의 하지 않은 은둔자였지만 최고의 기술력과 독특한 디자인 방법론으로 무장한 그를 알아본 건 주류 패션 브랜드들이었다. 스톤 아일랜드 섀도우 프로젝트 Stone Island Shadow Project, 에르노 Herno의 라미나 Laminar 라인 등의 독립적인 캡슐 컬렉션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았고, 나이키 Nike의 아웃도어 스포츠 라인 ACG All Conditions Gear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나이키와 스니커즈 협업 collaboration을 진행하면서 대중은 그의 이름을 깊이 각인한다.

    2015년 발매한 나이키 루나 포스 Lunar Force 1 을 시작으로, 에어 프레스토 Air Presto, 에어포스 Air Force 1 이 연달아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아크로님은 스트리트웨어 streetwear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아크로님 특유의 검은색과 올리브색 끈 디테일, 화려한 색감의 협업 스니커즈가 결합하여 ‘테크웨어 tech wear‘라는 새로운 장르로 탄생한다. 형태에 관한 그 어떤 콘셉트도 없이 디자인한 그의 옷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스타일 style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국, 대만, 홍콩 등을 중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마니아층이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특히 사이버 펑크 cyber punk스러운 3D 캐릭터에 아크로님 옷을 입힌 팬 아트 fan art가 등장하는 등 그의 디자인은 현실 세계를 넘어 가상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 중이다(메탈기어 솔리드 Metal Gear Solid로 유명한 코지마 히데오 Kojima Hideo 감독도 그의 팬임을 밝혀 비디오 게임에서도 그의 디자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증폭하는 상황이다).

    아크로님의 디자인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즐겨 입을 만한 스타일은 아니다. 나 역시 아크로님 코트를 입고 거리나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신기한 듯 쳐다보는 눈길을 종종 받는다. 이런 높은 취향의 벽 때문에 아크로님을 단순한 스트리트웨어로 규정짓고 크게 관심 두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아크로님의 결과적인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그가 제기했던 문제의식, 그리고 치열한 고민 끝에 내놓은 절차탁마의 해답들은 한 번쯤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과연 기능적으로 완벽한가?’

    최종적인 방향성에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그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나만의 해답을 조금씩 내놓는 중이다. 작게나마 디자인을 발표하고 생산과 판매 과정을 거치며, 독보적인 실력을 지닌 그가 왜 그리도 오랫동안 주류 시스템에 편입할 수 없었는지 뼈아프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어려움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극복하고 현재는 당당한 메인스트림으로 이름을 알린 그의 숨겨진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디자이너 중 그의 미래가 가장 궁금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크로님’을 다룬 유인양품 두 번째 칼럼에 이어, 아이소플럭스 ISOFLX 디자이너 이강일의 패션 토크가 오는 토요일 열립니다. 참여 방법은 아래 내용을 읽어주세요!

    아이소플럭스’ 디자이너 이강일의 패션 토크 세미나 제2회 We need to talk about ACRONYM®.

○ 행 사 명 : We need to talk about ACRONYM®
○ 일 시 : 2017년 12월 30일 토요일 18:30 ∼ 미정
○ 장 소 : 플럭스 리서치 랩, 서울시 강동구 풍성로 42길 33, 4층
○ 주 제 : 브랜드 ‘아크로님 Acronym®’과 ‘테크웨어’
○ 주요 내용
– 기능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 패션의 역사
– 디자이너 에롤슨 휴와 그의 디자인 철학
– 아크로님의 작품들과 콜라보레이션 디자인들 소개
○ 주 최 : 아이소플럭스 ISOFLX
○ 참가방법 : 카카오톡 오픈 채팅 ‘ISOFLX’ 또는 info@isoflx.com으로 참가 신청(성함, 참석 여부 기재)

    브랜드 ‘아이소플럭스’의 디자이너 이강일이 주최하는 패션 & 디자인 토크 세미나 We need to talk about FASHION 두 번째 시간, We need to talk about ACRONYM®이 12월 30일 오후 6시 반부터 아이소플럭스 쇼룸 ‘플럭스 리서치 랩’에서 열립니다. 패션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가 아닌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자는 취지로 개최하는 토크 세미나입니다.

    2017년 11월에 열린 첫 번째 ‘비즈빔 VISVIM’ 편에 이어 두번째로 선정된 브랜드는 아크로님 ACRONYM®입니다.

    아크로님은 소위 ‘테크웨어’라는 장르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며 몇 년 사이에 스트릿 패션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브랜드입니다. 얼핏보면 신진 브랜드처럼 보이지만, 첫 번째 컬렉션이 2002년에 발표될 정도로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테크 닌자’, ‘다크테크웨어’ 등과 같이 특정한 몇가지 스타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지만 그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는 독특하고 깊이 있는 철학을 가진 브랜드입니다. 

    허프 포스트, 더 네이비 매거진, 디매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연재하는 디자이너 이강일의 패션 칼럼 유인양품 2편 ‘ACRONYM® / J53TS-GT’의 내용을 바탕으로, 강의 후 주제와 관련된 질문 답변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장소는 아이소플럭스 쇼룸인 ‘플럭스 리서치 랩’이며 주소는 서울시 강동구 풍성로42길 33(성내동 522-12) 4층 입니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아이소플럭스 ISOFLX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또는 이메일 info@isoflx.com 을 통해 참가 의사를 알려주시면 됩니다(참석 취소를 원하실 때도 미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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