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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을 보고, 이창동의 15년 전 글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Text  Hong Sukwoo

Photography  Hong Sukwoo

    올해 가장 기다린 영화로 버닝 Burning, 2018을 골랐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영화로 유아인과 스티븐 연(이창동 감독은 그를 한국 이름 ‘연상엽’으로 불렀다), 신예 배우로 첫 주연작이자 데뷔작에 오른 전종서가 출연한 영화다. 운 좋게도 개봉 사흘 전, 용산에서 열린 시사회에서 미리 영화를 보았다. 초대해준 친구들과 처음 본 친구들이 모여, 깜깜한 종로3가 포장마차 거리에서 영화 얘기만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2018년 칸 영화제 Festival de Cannes 경쟁 부문에 진출하였고 그곳 시각으로5월16일 저녁 여섯 시 반에 세계 최초 공개, 즉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열리므로 영화에 관한 비평과 기사는 한국 개봉일5월17일 오전 여섯 시까지 엠바고가 걸렸다.

    사전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다.주인공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 그리고 벤(스티븐 연)이 출연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지만, 인물과 이야기의 큰 줄기는 전혀 다르다는 정도다. 자연스럽게 이창동 감독의 과거를 복기하다가, 그가15년 전 봄에 쓴 글을 하나 찾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잠시 접고 문화관광부 장관직에 올랐다. 당시 관계 부서 공무원들을 앞에 두고 엄숙하게 여는 취임식 대신, 문화부 웹사이트에 별도의 취임사를 올렸다. Poetry, 2010 이후 8년 만의 신작 영화를 본 후,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그가 15년 전에 쓴 글을 찾아 읽은 셈이다.

    말만 들어도 딱딱해 보이는 취임사라는 형식을 차치하고 긴 글을 읽어나가면, 당시 벌어진 사회적 비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며 공인 公人으로 막 새로운 장을 시작한 인간 이창동의 포부와 철학을 가늠할 수 있다. 취임사에는 사회와 예술, 문학과 소통, 기능과 비극, 그리고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자율과 창조에 관한 신념과 철학이 담겨 있다.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현대 한국인의 삶을 묘사하는 데 능하여 다섯 편의 영화만으로 거장 巨匠 칭호가 붙은 감독이다. 예상보다 소탈한 면모로 그 이름값보다 삶의 자취가 덜 알려졌다는 걸 떠올리면, 거대한 미사여구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의 새 영화를 보고, 과거의 영화를 찾다가 발견한 시대가 지난 글은 그러나 지금 읽어도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빼곡하다. 누군가에게는 지난 과거 파편이지만, 노무현과 보통 사람들 시대를 지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작금, 8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새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단절되었던 감독의 시간이 찰나로 느껴지는 틈새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 웹사이트 열린장관실 ‘연설문’ 메뉴에 오른 2003년 봄의 글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었다(딱히 베푸는 입장도 아니면서). 그래서 새 영화와 큰 관계없는 글을 야심한 시간에 썼다.

© 버닝 Burning. 감독 이창동, 주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2018.

    안녕하십니까. 이창동입니다.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이란 중책을 맡은 지 어느새 두 주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취임식을 생략하는 대신 취임사는 인터넷으로 올리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이제사 인사의 글을 올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포부나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뭔가 생각을 가다듬어 말씀을 드리고자 했지만,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단 30분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무엇보다 먼저, 취임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난 3월 1일 국립극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마친 뒤 대구로 내려가 지하철 참사 현장을 다녀왔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 형체도 찾지 못하는 유가족들의 핏발선 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시커멓게 그을음으로 뒤덮인 지하철역 구내 곳곳에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망자들의 온갖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한 성격이상자의 우발적 범죄, 또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 재난 시스템의 부재 등, 많은 이유와 원인을 말하고 있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도 주범은 한국사회의 ”관료주의”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을 이처럼 끔찍한 비극으로 확대시키고 악화시킨 것은 분명 아무도 스스로 책임지거나 판단하지 않는, 오직 무사안일 속에 자신을 숨기고 마는 ”관료주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일찍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성스러운 실존적 삶이 관료들이 앉은 책상들과 서류더미 사이로 내던져지고 결정되어지는 관료주의의 거대한 성(城)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뛰어난 상상력으로도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두 대의 전철 안에 갇힌 채 2000도 가까운 고열로 통째로 불타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묵시록적인 광경을 감히 상상해낼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고한 피해자들은 오늘 합동분향소의 영정사진으로, 또는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호소문 속에 남아 있는데, 가해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가해자들의 맨 앞에는 자신이 이 사회 전체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아무도 자신의 사정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틀리고 왜곡된 심사의 한 초라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다른 가해자들은 마치 흐릿한 그림자처럼 이름도 얼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얼굴 흐릿한 익명의 가해자들 중에 ”나”도 끼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공직자들은 뼈아프게 자인해야만 합니다.

    첫 인사말에서부터 이런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송구스럽지만, 참여정부의 출범 직전에 터진 이 사고를 저는 이제 막 공공의 직무를 시작하는 저 자신을 위한 무거운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사고가 난 뒤 전에도 늘 그랬듯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안전 시스템을 부산하게 재점검하고 있습니다. 재난에 대한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새 정부는 재난방지청의 신설을 준비하고 있고, 각종의 안전에 관한 매뉴얼도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적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스템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하철에서 증명되었듯이 수많은 모니터가 있어도 그것을 들여다볼 사람이 없었고, 고급 통신장비가 있어도 가장 위급한 순간에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조차 주고받질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날 사고가 나던 대구 지하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소통이 막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사회와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내는 플라스틱 휘발유 통을 들고 소통 대신 파괴를 선택합니다. 1079호, 1080호의 기관실과 조종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막혀 있으며, 객차에 있는 무고한 시민들은 한 마디의 경고도 듣지 못한 채 운명의 시간 직전까지 그냥 앉아 있습니다. 사고 발생 후, 대구시 당국과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기능이 얼마나 막혀 있는가를 비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소통”이란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과거에는 사회가 신분이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의사소통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화 되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의 방식이 민주화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정치적 제도는 민주화 되었으면서도 그 소통의 방식은 전혀 민주화 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와 정당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사회적 기능을 맡은 공적조직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눌려 마비되고 왜곡되어 기형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구지하철 사고는 그것의 비극적이고 상징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에서 인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 디지털 문명 등이 이미 우리의 일상을 시시각각 바꾸어놓고 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문명이 엄청난 양과 속도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은 바로 소위 ”문화 컨텐츠”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문화를 정치나 경제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보는 낡은 시각으로는 결코 오늘의 변화에 대처해낼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적 창의성과 자율성이 모든 생산·유통·소비 영역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문화적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에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앞으로의 문화적 변화를 주도할 중대한 역할이 바로 우리 문화관광부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문화가 산업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지난 정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상당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산업적 논리에는 상당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즉, 문화를 산업적,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본다면 ”문화도 돈 된다”는 식의 단순논리에 머물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되는” 문화(이를테면 게임이나 영화, 에니메이션, 관광 등)는 투자, 육성하고, ”돈 안되는” 문화(문학, 연극, 미술, 박물관 등)는 직접 지원해서 보호한다는 분리적 접근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근본적으로 지난 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도 돈 된다”가 아니라, ”돈 되는 문화, 돈 안되는 문화가 따로 없다”는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문화상품들이 중요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형식과 관점, 문화적 자율성과 창조성이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의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 영역에서 문화적 창조성과 자율성의 불씨를 불어 일으키도록 환경을 만들고 틀을 짜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모두가 ”돈 되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첫번째 과제 또는 목표는 문화예술, 체육, 관광 등의 각 분야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의견을 모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집행하도록 하며 정부는 지원만 할 뿐 민간에 권한과 책임을 대폭 넘겨주는 것으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문화란 자율과 창조가 생명인데, 지금처럼 정부의 관료들이 책상 위에서 정책을 만들어 현장으로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는 그 자율과 창조성을 살려낼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은 쉽지만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각 분야의 현장에 그만한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면 사정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각 분야마다 온갖 갈등과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으며, 자율적 논의를 하고 의견수렴을 할 수 있는 토양도 사람도 부족한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아마 숱한 어려움과 좌절을 겪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분명히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비효율과 시행착오가 드러나더라도 정부는 인내하고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행정에 있어서 민간의 자율적 참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제도, 어떤 시스템과 방법이 필요한지 연구하고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문화에 있어서 개혁의 분명한 방향이며, 참여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자율, 개방, 그리고 참여와 분권이라는 개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관인 제 개인만의 믿음도 아니며 참여정부의 의지만도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과 세계사적 변화의 요구이며, 오히려 우리나라는 너무나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란 삶의 형식이며 동시에 본질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이야기합니다만, 삶의 형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장관이 되고 난 뒤에 저는 우리 행정부 내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하여 꽤 놀랐습니다. 임명장 수여식, 취임식 등에서부터 장관에 대한 의전에 이르기까지 행정부 내에서 지켜져 오고 있는 관습과 문화가 일반대중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장관실 앞에만 깔려 있는 붉은 카펫, 장관이 나타나면 부동자세로 서 있는 직원들,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무관 비서가 꼬박꼬박 장관의 차 문을 대신 열어주는 것, 장관에게 누구나 허리를 90도로 꺾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좀 실례되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조폭문화”를 연상했습니다. ”조폭”이란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격리되어 있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그래서 곧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행정문화 속에 이런 권위주의적인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행정부와 일반국민과의 거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 우리 문화관광부에서부터 과감히 이런 권위주의적 관습과 문화를 버리자고 권합니다. 장관이라는 직위에 걸맞는 권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자연스런 예의를 표시하는 것과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통해 장관을 대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무원이므로 반드시 넥타이와 양복을 매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공무원으로서의 품위와 도덕적 엄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 또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그 나라 문화부 공직자들을 더러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복장에서부터 ”공무원 냄새”를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복장이 자유로운 만큼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자유롭고 유연했습니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언필칭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린 장관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느냐 어쩌냐가 신문 방송의 뉴스꺼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진정한 토론,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문화예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체육행정과 관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직의 의무 속에 갇혀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 옷을 벗어 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문화관광부가 국민들에게 ”문화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꿈을 부여하는지” 안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 우리 문화관광부의 위상이 자리 매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함께, 감동이 살아 있는 문화 행정을 펼쳐나갈 것을 약속하면서 두서없는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3월 13일 오후
    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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