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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더스 호텔의 룸서비스

왜 여행이든 출장이든, 항상 그렇게 ‘나가려고’ 할까.

 

Text  Hong Sukwoo

Photography  Hong Sukwoo

© Room Service at Traders Hotel Kuala Lumpur. Photographed by Hong Sukwoo.

    화요일 밤, 아니 정확히는 자정을 넘겨 새벽 한 시 조금 넘어서 호텔 로비에 도착했으니 수요일 새벽이었다. 유난히 늦게 나온 수화물 가방을 기다릴 때,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젊은 일본 남자가 짧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저기, 같은 비행기 탔지? 혹시 짐 나왔어?
    아니, 나도 아직 안 나왔어.

    몇 분 지났을까. 같은 비행기에 탄 거의 모두가 밤의 공항을 빠져나가고도 남았을 무렵, 마지막 수화물이라는 표시가 컨베이어 벨트 위 화면에 깜빡이면서 서서히 남색 무인양품 여행 가방이 완만한 곡선의 도돌이표 위로 올라섰다. 세상 수화물 가방의 몇 할은 남색이니까, 그나마 헷갈리지 않고자 포터 Porter의 흰색 가죽 명찰을 달았다.

    저기 보이지, 남색 가방. 그러니까 너도 금방 나올 거야. 좋은 여행 하길.
    아, 고마워. 너도.

    가방을 찾고, 입국 심사가 없는 대신 지문을 찍은 다음 가방 엑스레이 검사를 한 번 더 받고, 동남아의 우버 Uber, 그랩 Grab(이제는 우버가 실제로 인수했으니 이런 별명도 그만둬야겠다)을 불러서 트레이더스 호텔 Traders Hotel Kuala Lumpur로 왔을 때는 녹초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웠다. 한 시간 남짓 달린 도로는 깜깜한 탓인지, 아니면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웬만한 거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인천이나 김포와 다를 게 없었다. 쿠알라룸푸르로 처음 들어가는 인상은 그랬다.

    친절한 그랩 운전사가 짐을 내려주는 동안 호텔 정문의 안내인들은 늦은 시간 탓인지 잡담을 나눴다. 밤이지만 관광객들은 삼삼오오 로비를 서성였다. 짧은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가는 카드키를 받았다. 30층. 킹사이즈 침대가 하나 있는 트레이더스 클럽 트윈 타워 뷰 Traders Club Twin Tower View. 이 호텔의 거의 꼭대기 층이다.

    빠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에 들어갔다. 긴 나무 책상과 소파, 안락의자와 개인 금고, 충분한 나무 옷걸이와 생수. 호텔에 혼자 머물 때 기대하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구성이었다. 쿠알라룸푸르 패션위크에서 보낸 과일, 컵케이크, 패션위크 향수 후원사 딥티크 Diptyque Paris의 향초와 핸드크림, 초콜릿과 수제 쿠키 세트가 깜짝 선물처럼 방 곳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패션위크를 설명하는 서류 파일도 옆에 있었다. 질과 촉감 모두 좋은 종이 위에 각 후원사와 패션위크가 어떤 식으로 연계했는지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이런 세심한 설명을 ‘본’ 경험은 훗날 어디선가 쓸 데가 있을 것이다). 짐을 풀기도 전에 쓰러지면 안 되었다. 다시 하루가 시작하기 전에 마쳐야 할 일이 여럿 있었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지역 방송을 틀고 주전부리를 먹었다. 느긋한 아침을 먹었다는 핑계로 비행기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의 공중파 방송은 ‘한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늦은 시간에 나오는 드라마들이 어쩐지 서울에서 본 것들과 닮았다.

    잠은 새벽 늦게 들었다. 이미 해가 뜬 후였다. 불안한 마음에 알람을 다섯 개나 맞추고, 수십 번은 울렸을 소리를 무의식에 끈 것인지, 아니면 잠이 나를 이겼는지 모를 사이에 방을 청소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홉 시였다. 어떤 알람보다 빠르게 일어났다. 열두 시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고마워요. 오전에는 홍콩과 한국에 보낼 자료를 각각 만들어 보내고, 처음 가는 건물의 처음 보는 패션위크로 쿠알라룸푸르 첫 여정을 떠났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훌쩍 지났다.

    쿠알라룸푸르 도심 중의 도심, 수많은 유럽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거대 매장 주위를 거닐었다. 컬렉션과 컬렉션 사이, 서점을 하나 찾아서 들어갔으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컬렉션이 열리는 쇼핑몰 파빌리온 쿠알라룸푸르 Pavilion KL는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남짓 걸리는데, 지금 이 동네가 영업하는 온갖 상점과 호텔을 빼면 죄다 공사 중이라 교통 상황이 썩 좋지 않고 길은 헷갈렸다. 돌아오는 길은 ‘감’만 믿고 걷다가 완벽하게 다른 길로 빠졌다. 땀이 싫지는 않지만, 서서히 몸이 무거워졌고 목은 타들어 갔다. 어서 내 방에 가고 싶었다. 여차여차 돌아온 로비가 어찌나 반갑던지.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고, 간단히 샤워하고, 상쾌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번화가 반대쪽 동네를 탐험하는 것이 저녁의 계획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행하지 못했다.

    미로 같은 도시를 헤매는 사이, 한국에서 자꾸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2018년 9월의 일, 그리고 서서히 닥치는 8월의 일. 문자로 나눈 이야기는 결국 노트북 컴퓨터 앞으로 이어졌다. 그사이 오늘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몇 장을 보정하거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오늘의 일 이야기는 여기서 마쳐야겠다고 다짐하니 금세 밤 열 시에 가까워졌다. 샤워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분 좋게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보송보송한 상태로 바르는 로션의 감촉이 좋았다.

    이제 나갈 채비는 마쳤는데,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려다가 문득 생각하였다. 왜 여행이든 출장이든, 항상 그렇게 ‘나가려고’ 할까. 더 많이 걷고 생경한 남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좋지만, 호텔 방에만 있거나 카페에 앉아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것을 어째서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않을까.

    여행자의 시간이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시간과 줄다리기한다. 둥근 모래시계의 양쪽처럼 한쪽이 가득 차면 다른 쪽은 텅 빈다. 그런 불안 탓에 항상 여행지에서 발이 부르트게 걸었다. 나가려던 계획을 과감하게 접고 룸서비스 room service를 시켰다. 배를 점령한 거지들은 이미 단체로 시위하고 있었다. 동네 맛집을 가지 않았으니, 호텔 요리라도 지역 음식으로 먹기로 했다. 치킨 비르야니 Chicken Biryani와 와일드 머쉬룸 Wild Mushroom을 주문했다. 생수와 얼음도 달라고 했다. 물이 오고, 따끈한 접시에 담긴 음식이 오고, 서버와 서명을 하고(서비스 비용 10%를 가격에 포함한다고 룸서비스 메뉴에 적혀 있다), 얼음이 왔다. 음식은 각각 33링깃 RM(말레이시아 화폐 단위)과 30.20링깃. 소수점을 깎은 최종 비용은 63.20링깃. 한국 돈으로 17,000원 남짓에 이 정도 품질과 가격이면 훌륭하다. 먹을 채비를 마치고, 비행기에서 읽다 만 <설국>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책 대신 보다 만 넷플릭스 영화를 틀었다. 첫술을 뜨니 혼잣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행복하다.

    쿠알라룸푸르에 와서도 머리를 식힌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걸 룸서비스 음식을 먹으면서 깨달았다. 바보 아닌가. 서울에 돌아가면 다시 파묻힐 텐데, 스스로 여유를 찾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빈 접시가 방에서 나간 후 이곳에서 수백 번은 들은 노래를 틀고, 나른해진 마음으로 내일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쓴다. 불투명한 커튼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빌딩들이 외국 타지라고 새삼스레 말해준다. 찬 커피를 마시다가, 맥주를 한 캔 땄다. 다른 나라, 편안한 호텔에서 주문한 지역 음식을 먹으며 보낸 저녁 몇 시간이 이번 여름 최초의 ‘작은 휴가’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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