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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

 

Text  Hong Sukwoo

Photography  The NAVY Magazine

    피천득 Pi Chun-deuk·皮千得의 수필에 관해 여러 번 짧은 글을 썼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따뜻한 가족애, 온갖 긍정하는 대상을 향한 애정, 나지막하게 고백하듯 읊조리는 사소한 욕망을 상쇄하는 상쾌한 정서 같은 것들. 그가 흙집을 짓고 잔디밭을 거닐며 살던 시절과는 많은 것이 변하였지만, 그가 써 내린 글에 담긴 정서와 마음씨는 결코 사라지거나 구식이 되지 않았다.

© 피천득 Pi Chun-deuk·皮千得, 수필 The Essay. 남색 울 비니 Ribbed Wool Beanie랑방 Lanvin. Photographed by The NAVY Magazine.

    호 금아 琴兒로 유명한 선생의 수필 essay을 처음 접한 시점은 중학교 혹은 고교 시절이었다. 유명한 수필 인연 Affinity이 국어인가 문학 교과서에 나왔다. 그때 크게 관심은 없었다. 추리 소설에 빠진 장르 문학 선호 소년에게 잔잔한 생활형 문장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심미안은 없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후 그의 글에 다시 관심 둔 것은 기억하건대 그의 말년이었다. 2007년 작고하셨을 때는, 다소 어린 마음이었지만 살아계실 때 인터뷰를 빙자한 대화를 한 번이라도 나누었으면, 하고 안타까움과 아쉬움마저 느꼈다.

    미려한 제목 대신 단출하게 수필 The Essays로 이름 붙인 피천득의 수필집이 범우문고 Bumwoo Books 시리즈의 첫 책이라는 점 또한 뜻깊다. 이 작고 가벼운 문고판으로 나는 두 권의 수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코팅한 상아색 표지로, 강렬한 주황색 표지가 되려 우아하게 느껴지는 무광 표지로 바꾸기 전 나온 판본이다. 어떤 판본이든지 사실 상관은 없다.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들은 포장이 어떻든 속살을 향한 탐구 정신이 다른 모든 곁가지를 넘어서게 했다.

    2014년 3월, 남성복 디자이너 김선호 Kim Sunho그라운드웨이브 GROUNDWAVE당신의 소년기, yourboyhood.com의 협업 캡슐 컬렉션에도 가장 커다란 영감은 ‘문고판 책’이었다. 그 책이 들어갈 작은 주머니를 피천득의 수필을 비롯한 몇 권의 범우문고 책으로 재단했다.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범우문고판 책의 치수를 재고, 소재에 대고 직접 그려서 주머니를 만들었다. 그렇게 남색 큰 치수 코트 oversized coat와 스웨트셔츠 sweatshirt에 들어간 주머니에는 ‘브이 v‘ 모양 선이 파였다. 범우문고 책을 넣으면 딱 제목만 보이도록 맞췄다.

    피천득과 그의 수필을 이야기하다 다른 길로 샜다. 선생의 수필은 그야말로 ‘수필’이라는 장르에 마음이 벅찰 모든 요소를 갖추었다. 사소한 관찰과 삶 속 이야기는 응당 작가만의 경험과 감상의 나열이나, 공격적이지도 논란을 일부러 일으키지도 않는 단어와 문장들에 삶을 대하는 부드러운 시선이 담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단한 취향을 지녔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른지 논할 때 독자적인 뿌리가 깊으며, 과시적이거나 으스대지도 않고, 모든 낮고 작은 것으로부터 사람들의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문장을 지어냈다.

    비단 어떤 분야에 통달했다든지 특별히 경외할 정도의 지식을 머리에 가득 채웠다고 내놓을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삶 안에 관계한, 사랑하는 사람과 과거와 경험을 바라보는 선생의 태도가 평소 고스란히 자리매김하였을 것이다. 일기처럼 쓴 글 안에 그저 소복이 쌓인 것뿐이다.

    범우문고수필을 굳이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짧은 옴니버스식 수필 모음이며 앞뒤로 연결한 내용은 아니어서, 손끝으로 책을 넘기다 마음에 드는 제목을 발견하면 곧바로 읽어도 좋다. 강남역 뒷골목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읽은 글도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 대신 종이를 더 집어 들자고 마음 먹고선 무게와 크기가 아담한 문고판에 견줄 대안이 없다. 검정 면 가방에 든 피천득의 글을 도로에 서서 읽다가, 선생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쓴 글 – 나의 사랑하는 생활 – 을 보았다.

    작년 봄, 일에 찌들어갈 무렵 일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좋아하는 것들을 적었더랬다. 비가 조금씩 내렸다 말았다 했고, 늦은 주말 저녁과 대비하는 바쁜 일정과 다음 주 생각들이 사실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그 짧은 시간 수필 한 편 보는 동안 어쩐지 글이 쓰고 싶어졌다. 커피 얼룩이 짙게 바랬고 헌책처럼 표지가 구겨졌어도, 언제든 생각날 때 한 번씩 펼쳐보고 ‘살아간다’는 감정을 일깨우는 책이 선생의 글이요 수필이다.

더 네이비 매거진 북 클럽 The NAVY Magazine Book Club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 SNS 시대가 오면서 사람들은 장문이 들어간 책에 좀처럼 눈을 붙이지 못한다. 하지만 두툼한 종이로 된 책을 손에 쥐고, 한 장씩 손으로 넘기면서 사색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언가 적거나 떠올리는 행동은 무수한 영감의 원천이 됐다. 독서의 위기라는 시대, 한 권의 책을 읽는 행위는 놓지 말아야 하는 생활 양식이다.

    수많은 출판물이 사실 주위에 있다. 수필과 인문학 서적, 전문서와 잡지, 사진집과 교양서적 등을 본다. 책과 잡지, 특히 ‘종이 paper‘라는 물성을 지녀 넘기는 맛이 있으며 편집의 오롯한 결과물로 남은 보석 같은 책이 주변에 있다. 더 네이비 매거진 북 클럽 The NAVY Magazine Book Club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직접 읽은 출판물 중 일부를 직접 골라 정기적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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