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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슬리먼 Hedi Slimane

Hedi Slimane, Dior Homme and Saint Laurent.

Text  Hong Sukwoo

Photography  Hedi Slimane, Dior Homme and Saint Laurent

Hedi Slimane.

    깡마른 소년들에게 스키니 진과 블랙 타이를 제공한 에디 슬리먼 Hedi Slimane디올 옴므 Dior Homme로 21세기 남성상을 바꿨다. 록 rock 음악과 길거리 street 청년문화 youth culture와 만난 고급 남성복이란 에디 슬리먼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디올 옴므의 아티스틱 디렉터 artistic director에서 물러난 그가 브랜드 이름까지 바꾸면서 다시 돌아온 곳이 생로랑 Saint Laurent이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디올 옴므를 맡기 전, 첫 런웨이 컬렉션을 선보인 브랜드가 이브 생로랑이었다. 생전의 무슈 생로랑 Monsieur Yves Saint Laurent톰 포드 Tom Ford의 이브 생로랑 데뷔 컬렉션을 보지 않고, 에디 슬리먼의 디올 옴므 컬렉션을 보러 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에디 슬리먼은 대중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웬만한 패션 디자이너는 하나씩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도 없다. 대신 생로랑의 온갖 요소가 철저하게 그의 손을 거친다. 세계 곳곳의 매장 인테리어는 물론, 길거리와 허름한 클럽에서 모델을 캐스팅하고, 웹사이트의 화면 구성과 폰트를 정하고, 무슈 생로랑 시절의 아카이브를 담은 아틀리에 사진을 공개한다. 그는 패션 브랜드의 수장이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진가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위의 땀방울과 주근깨 가득한 모공, 고독하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소년·소녀들이 디올 옴므 시절 펴낸 사진집 베를린 Berlin인터미션 Intermission부터 영감의 원천인 록 음악가들 rock musicians의 포트레이트 록 다이어리 Rock Diary, 그간 작업을 집대성한 앤솔로지 오브 어 디케이드 Anthology of A Decade에 가득 찼다. 그에게 사진은 패션의 영감이자 동시대 청년문화의 충실한 관찰이었다.

© BELRIN,2003. Published by Edition 7L. London: Birth of a Cult, 2005. Published by Steidl Verlag. Photographed by The NAVY Magazine.

    에디슬리먼이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면, 고인이 된 이브 생로랑은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혁명가였다. 컬렉션이 매장 안의 살롱 쇼에 가깝던 시절, 그는 처음으로 쇼에 음악을 사용했다. 그가 처음 소개한 여성을 위한 바지 턱시도 르스모킹 Le Smoking은 말 그대로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물었다. 1966년, 패션 사진가 헬무트 뉴튼 Helmut Newton이 담아낸 양성적인 androgynous 분위기의 ’르 스모킹’ 사진은 여성의 권익 강화를 주장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포마드를 발라 빗어 넘긴 머리에 턱시도 재킷과 바지, 드레스셔츠를 입은 여성’이라는 발상을 떠올리지 못하던 시절,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기 이전이었다.

    이브 생로랑은 예술의 열정적인 후원자이기도 했다. 피에르 베르제-이브 생로랑 재단 Fondation Pierre Bergé-Yves Saint Laurent을 운영한 이브 생로랑의 파트너 고 피에르 베르제는 일생의 연인 이브 생로랑이 작고한 1년 뒤, 함께 모은 예술품 컬렉션을 크리스티 Christie’s 경매에 내놓았다. 고대 이집트 조각과 청나라 시대 청동상부터 마티스 Henri Matisse피카소 Pablo Picasso, 몬드리안 Piet Mondrian에 이르기까지 총 733점에 달하는 작품은 그가 생전에 얼마나 예술과 가까이 지냈는지 알게 했다. 

    특히 이브 생로랑에게 예술은 단지 수집의 대상이 아닌 영감의 원천이었다. 1966년 발표한 몬드리안 컬렉션 The Mondrian collection은 몬드리안 특유의 선과 면, 대칭과 강조 기법을 패션에 이식한 작업이었다. 이 컬렉션이 성공을 거둔 후 직접 거금을 들여 몬드리안 작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현재 가장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현대 예술가로 평가받는 앤디 워홀 Andy Warhol의 실크스크린 자화상 portrait 시리즈에서는 직접 모델이 되기도 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자화상을 보며, 그가 얼마나 많은 억압과 압박 속에서 재능을 꽃피웠는지 떠올리곤 한다.

© Hedi Slimane Diary, September 01, 2017. Photographed by Hedi Slimane.

 

P.S. 2017년의 추신.

    2017년은 생로랑, 에디 슬리먼, 그리고 피에르 베르제 모두에게 변화의 시기였다. 먼저, 에디 슬리먼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흔치 않은 격렬한 애정을 드러낸 피에르 베르제는 고인이 되었다. 온갖 소문과 비방이 난무하는 패션계에서 그를 험담하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다. 그는 충실한 중재자였고, 애정 어린 파트너였으며, 후대를 위해 길을 밝힐 줄 아는 등대이기도 하였다.

    에디 슬리먼의 디자인 철학이나 생각을 듬뿍 담은 인터뷰가 하나 더 있다. 

    “프라이버시는 오늘날 남은 유일하고 진정한 럭셔리로 보입니다 Privacy seems to be the only true luxury left today.”

   인터뷰를 극히 제한적으로 했던, 특히 여러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생로랑’ 시절 에디 슬리먼이 2015년 8월, 미국 야후 스타일 Yahoo! Style과 나눈, 장문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말이다.

   ‘프라이버시’는 사생활로 번역할 수도, 남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혼자 있는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저 홀로 있다는 상황은 요즘 시대에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 인터뷰는 ‘이브 생로랑’을 ‘생로랑 파리’로 ‘복원’한 과정과 의미, 새로 전개한 고급 맞춤복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컬렉션의 작업 과정 이야기로 시작한다. 물론 에디 슬리먼이 생로랑(정확히는 생로랑을 소유한 케링 Kering 그룹)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결별한 이래, 그의 과거 작업 전체를 ‘지운’ 지금 생로랑으로는 한낱 과거 흔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뷰에 공개한 사적인 의견들은, 디올 옴므와 생 로랑 시절 쏟아져나온 ‘에디 슬리먼 스타일’ 패션 이미지들과 달리 극히 이례적이고 드물다. 한마디로 읽을 가치가 있다.

    안소니 바카렐로 Anthony Vaccarello에게 후임 자리를 넘긴 에디 슬리먼은, 2017년 11월 현재 특별한 공식 활동이나 다른 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을 거라는 소문 없이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는 듯하다. 그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그리고 에디 슬리먼 다이어리 hedislimane.com/diary에는 제2의 고향을 넘어 삶의 터전이 된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에서 찍은 온갖 사람의 초상 사진만이 올라온다. 이탈리아 보그 VOGUE Italia 2017년도 9월호에 캘리포니아 사진들을 싣고, 오랜만에 장문 인터뷰에 나섰다는 점만이 그의 ‘육성’을 활자로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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